Review

Movie: 행복을 찾아서

ziin 2021. 6. 5. 22:52

 

지난 주 일요일, 동생과 엄마와 본 영화.

본 지 일주일 정도 지났다고 벌써 느낌이 흐릿하다.

다만 기억에 남는 건, 언젠가 뭔가 좀 열심히 해서 성취하는 영화 찾던 적이 있는데 이걸 봐야겠다는 점.

 

1. '좋은 아빠'라는 '행복'을 찾는, '가난'해서 '불행'한 주인공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제목이 왜 '행복을 찾아서'인 줄 모르겠다. 혹시나 한국판 이름이 이상해서일까, 하고 찾아본 원제목도 'The Pursuit of Happiness'. 행복에 관해 말하고 싶은 영화가 맞긴 한 거 같은데. 대사에서 직접적으로 몇 번 단어를 언급한 거 이외로, '행복'에 관한 특별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

 

주인공의 행복은, 좋은 아빠가 되어주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 그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건 돈. 돈을 벌어 행복을 찾기 위해, 주인공은 영겁과 같은 불행의 시간을 겪는다. 영화 마지막 3분을 제외하고 근 2시간 가까이, 주인공은 (아마 아들도 홈리스 생활이 힘들었겠지만) 눈물까지 보이며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궁금한 점은, 분명 주인공의 행복은 '좋은 아빠'인데 그 반대인 불행은 '가난'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은 아들에게 자상한 아빠다. 다만, 가난하기에 물질적으로 풍부한 삶을 주지 못할 뿐. 단순히 '좋은 아빠'가 행복이었다면 그 반대는 '나쁜 아빠'. 그러니까 자상하지 못한 아빠여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의 행복은 '부자 아빠로서 아들에게 물질적으로 풍부한 삶을 보내게 해주는 것'인 것 같다. 영화 초반의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는 대사는 물질적 풍요와는 거리가 멀어보였기에 잠시 헷갈렸다. 그저 함께 지내면서 애정을 주는 것을 '좋은 아빠'라고 초반에 정의한 것 치곤, 주인공은 늘 좋은 아빠였다. 가난한 게 아쉬웠을 뿐이지.

 

그러니까 주인공의 행복은, 목표는, 결국 돈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부성애가 무지 진하게 그려지긴 하지만, 그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같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노력하고 변화가 일어나는 부분은 직업, 그러니까 돈이다. 주식브로커라는 목표도 결국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선택했다. 본인의 수학적 감각을 근거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선택한 것이지, 뭐 오랜 꿈이었거나 직업에 대한 개인적인 열망이나 선호도 없다. 그저, 돈을 더 많이 벌어 아들과 함께 지내기 위함.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다.

 

부성애, '좋은 아빠', '행복'이라는 보기 좋은 목표를 좇는 거 같아 보였지만. 결국 이 영화는 가난해서 불행했던 주인공이 돈이라는 행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2. '행복'의 오남용

 

저 주인공 윌스미스 지니 아저씨가 행복을 뭐라고 정의하든 사실 나에겐 큰 상관이 없다. 돈이든, 부성애든. 그저 나는 이 영화를 열정이 식어가고 멘탈이 흔들릴 때 다시 볼 것 같다.

 

왜냐면, 내가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것은 '성취'이기 때문이다. 나는 목표를 성취할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 삶의 이유를 느끼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주인공은 정규직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그 성취 과정이 매우 다사다난하고, 사람의 의지의 끝을 시험하는 수준의 하드코어라, 나에게 자극제가 될 것 같아 다시 볼 예정이다. 

 

근데 뭐 이걸 자세히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고, '행복'에 대해 논하고 싶다. 나는 행복이란 단어가 싫다. 꼭 그것을 지칭해야할 상황이 아니고서야 어지간하면 내뱉지 않는다. 나에겐 허상의, 다소 짜증나는 단어다, 행복. 사실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를 뿐더러 추구하고 싶지도 않다.

 

언제부턴가 '행복'이란 단어가 미디어든, 책이든 그 온갖 곳에 나오면서, 행복하지 않으면 삶을 헛되이 보내는, 불쌍한 사람 취급하고 있다. 행복이 돈이 되니까, 마케팅을 그렇게 하는 건 알고 있는데, 근데 이 마케팅이 모든 사람들의 사고방식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러면서 은근하게 삶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처럼 느껴진다. 행복이 아니라면 불행. 사실 난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는데, 행복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불쌍히 여기며 불행하다고 단정짓는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단어를 추구할수록, 삶이 참 별볼일 없어지는 것 같다. 행복할 거리가 별로 없는 요즘 세상에선 끊임없는 자기합리화만이 행복을 만들어낸다. 구조적인 문제든, 개인적인 문제든, 어쨌든 크고 거대한 걸 기대하고 성취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래서 별볼일 없는 작은 것을, '소확행'이니 뭐니 하면서 행복이라 되뇌인다. 행복을 착즙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든 행복하고 싶어서, 사소한 것까지 행복이라 이름붙이며 나는 행복한 거야, 이게 바로 행복이지, 하며 자기합리화를 한다면 그게 행복한 걸까. 이래야만 행복한 거라면 난 그냥 안 행복한 사람으로 남을래.

 

결국 객관적으로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고작 마음 하나 좀 편해지겠다고 '행복'이란 걸 오남용하며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 같다. 그래서 난 행복이란 단어마저 싫다. 이걸 추구하면, 분명 현실이 갑자기 불만스러워지고, 어떻게든 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저그런 현실에 순응하며 만족하는 자기합리화를 통해 행복을 착즙해야한다. 그리고 이게 습관이 되면, 그냥 그저그런 삶에 만족해하며 살아가는 그저그런 사람이 되는 거 아닐까. 마음 편히 살겠다고 잃는 게 너무 크다.

 

그저 신기루처럼, 막연히 좇고 있었던 나의 행복을,

남들이 자꾸, 그게 정말 너의 행복이니?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고? 그게 행복이라면 넌 평생 행복해지기 힘들어. 그 행복을 달성해도 뭔가 허전할 걸? 내가 겪어봤거든. 중요한 걸 모르고 있네. 그런 건 행복이 아냐. 소소한 게 결국 행복이지. 

이런 식으로 훈수두며 깎아내리며 대안으로 제시한다는 게, 현실에 순응하며 작은 것까지 착즙해야만 하는 것이라니. 그래서 이젠 난 행복이란 글자마저 싫다.

 

그래서, 사실 나는 이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가 좋은 걸지도 모른다. 행복은 성취다. 돈이든, 명예든, 직업이든. 목표한 바를 성취하는 게 바로 행복이다. 작고 작은 사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착즙하는 것들만 보다가, 오랜만에 내가 생각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성취가, 행복을 그리는 영화를 만나, 나는 내심 만족스러웠던 걸지도 모른다. 물론 제목의 저 글자는 아직도 싫지만!